나는 어떻게 30대에 서울대 간호대학에 편입하게 되었는가
인생 최악의 상황, 음대생의 정체성이 갑자기 바뀌다
내가 서울대 간호대학에 편입했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나날들이었다. 당시의 나는 소위 괜찮은 인서울 음악대학을 졸업한 음대생으로 좋은 남편을 만나 적당한 월급이 나오는 직업을 갖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해 우리 가족은 오갈 곳 없는 상황이 찾아오게 되었고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일방적인 통보로 나를 떠났다.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공간은 신촌 고시원 한켠이었고 그나마도 총무를 하면서 고시원비를 냈다. 나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강제'로 달라져야만 했다.
나는 알바로 영어선생님을 시작했고 고마운 선배의 도움으로 어쩌다 시작하게 된 음악잡지 관련 기자일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신문지의 기자가 되어 일을 했다. 기자로 여기저기 일정에 맞춰 취재를 위해 떠돌아 다니는 일은 되려 나를 살게 해주었다. 더군다나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소식과 정보를 전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기자가 되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뒤를 캐서 이슈나 특종을 만들고 광고를 따내야 하는 일이기도 했고, 밤술은 기본이고 더러 낮술도 마셔야 하는 일이었기에 내가 평생 할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이미 설명한대로 한국에서의 삶이 녹록치않았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데다 내가 힘든일을 다시 겪고보니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 얼마나 더더욱 가치로운지를 깨닫게 됐다. 그렇게 나는 외국에서도 직업을 가질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수 있는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알아보니 미국 간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간호사 자격증을 따고 한국 병원에서 얼마간 일을 한 후에 미국간호사 시험을 치는 루트로 보여졌다. 그래서 나는 내 나이 29살에 어느곳이든 다시 간호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편입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편입영어 시험 성적이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 뉴질랜드에서 collage를 졸업한 경험이 있었기에 영어는 항상 어느정도 한다는 과신을 하고 있던 나였지만 편입영어는 정말이지 너무 비현실적인 영어공부였다. 나는 어느순간 부터 텝스로 영어입학시험을 반영하는데다 학사편입을 할 수있는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편입학원에서 조차 서울대 간호대학에 편입과 관련해서는 선사례 부족으로 관련정보가 많지가 않다고 했으며 내 주변 지인들은 모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내가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에 편입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 '응, 니 이야기는 잘 들었어,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라는 속마음을 나에게 눈빛으로 보내곤 했다.
우선 서울대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텝스성적을 만들어야 했기에 나는 하루는 실제 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텝스모의고사를 풀고 하루는 그렇게 푼 모의고사 풀이를 했다. 텝스 성적은 그렇게 한꺼번에 잘 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절실했고 꾸준히 그렇게 공부를 하던 어느날 만족할 만한 점수가 나왔다.
간호에 진심인 사람
지금은 서울대 간호대학에서도 편입시험을 볼때 간호학의 기본지식을 묻는 시험을 친다. 하지만 내가 입학할 당시에는 전적대학 성적과 면접 그리고 텝스영어성적으로 편입을 할 수 있던 시기였다. 음악대학을 다닐때 영어영문학과를 복수전공하면서도 열심히 학과공부를 한 덕분에 학점관리는 잘 되어 있었고 노력한 끝에 어느정도 만족할 만한 텝스성적도 얻었지만 면접은 정말 예상 밖의 영역이었다. 시험을 볼때 어떤 질문을 받을지도 모르겠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지만 끝까지 불안했던 것 같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다. 나의 삶을 바꾸어 달라고.
평소에도 마음이 불안하면 서점을 가서 이런저런 책을 살펴보기도 하던 나는 시험 전날 서점에 들러 시간을 보내던 중 의료정보와 관련한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덕분에 면접 당일 간호정보 교수님의 질문에 잘 대처할수가 있었다. 사실 너무 떨려서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지금은 잘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서울대 간호대학에서는 편입생을 3명만 뽑는데다가 아무래도 조건이 엇비슷한 사람들이 지원을 했을것이기 때문에 합격은 더더욱 예상을 할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합격소식은 나에게 너무나 간절한 것이었기 때문에 합격공고가 뜰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조금 이른 시간에 학과 사무실에 조심스럽게 연락을 했다.
" 아, 이름이 뭐라고요? 어, 명단에서 본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간에 나는 슬플때나 눈물이 나는 것인줄 생각했는데 가장 기쁜 순간에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것 같다.
이후 학교생활을 하면서 당시 면접때 뵈었던 교수님께 저를 왜 뽑아 주셨는지 여쭤본적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 간호사를 젤 오래할 것 같은 사람을 뽑았어" 하고 말씀 해주셨다.
그렇다.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임상 오래했어요'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임상년차를 쌓은 간호사가 되었고 나는 간호에 정말 진심인 사람이고 앞으로도 쭉 그럴 예정이다.
지금 돌아보면 뭐가 그렇게 힘들었었나 싶기도 한데 간호사가 되어서는 더더욱 한 사람의 삶의 무게를 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마음대로 규정지을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경험을 통해 한가지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용기를 내어 그 시간을 지나면 다시 웃을수 있는 날도 분명히 찾아온다는 것이다. 담담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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